디지털 월드가 다시 부른다

시작은 다마고치를 가지고 놀던 작은 아이··· 아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던 순진한 모험가가 되었고 카드배틀의 우승자, 아레나의 챔피언이 되기도 하였으며 또 한때는 세상을 구원할 선택받은 아이 우연한 계기로 차원을 넘어 온 테이머 전설속의 십투사와 핵펀치 동네 싸움대장··· 한순간의 실수로 커다란 죄를 지은 원죄의 아이와 극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조연 나부랭이까지 많은 세월이 흐르고 디지털 월드는 다시 한번 아이를 부른다. 비록 아이는 비가 오면 무릎이 쑤시는 노구가 되어버렸지만 결국 의지 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었을 것이다 늙고 병든 몸이지만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법 오랜만의 부름에 빛을 잃고 힘없이 늘어졌던 노인의 눈가엔 천진난만하고 자신감 넘치던 어린 시절의 초심이 깃들었으니 노인은 목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펴 사뭇 당당한 모습으로 소리 높여 크게 외쳤다! 가자! 아구몬! 파피몬! ?? : 내껀데? 노인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번 겪은 일이었음에 새삼스래 놀랄 필요도 없었다 이 친구들의 위세와 인기는 너무도 비대해졌기에 이미 누군가 선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선점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문제였으리 그렇다면 그들과 맞먹는 적폐 혈통을 데려오면 될 일 가자! 브이몬! ?? : 내껀데? 노인은 이번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친구의 역사와 전통은 위 두 개체보다도 오래되었고 그 인기 또한 전혀 뒤지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동등한 위세를 지닌 또 다른 파트너를 데려오면 될 일 가자! 길몬! 돌몬! ?? : 내껀데? 노인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 또한 충분히 예상했던 일 두 친구는 언제나 주역으로서 핵심을 담당하였으니 어쩌면 또 어디선가 중요한 쓰임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교적 유명세는 부족하나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파트너를 데려오면 될 일 가자! 헉몬! ?? : 내껀데? 이런! 노인은 당황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또한 가능한 일 이 친구는 극소수만이 보유한 최강자 타이틀을 이어받은 기린아였으니 누군가 선점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웬만해선 탐내지 않을 고참을 데려오면 될 일 가자! 에렉몬! ?? : 내껀데? 이런! 기나긴 역사 속에서 뒤지기만 했던 녀석을 누가 선점했단 말인가? 이내 분노를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이 녀석 또한 긴 세월을 거쳐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시킨,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최종적인 능력은 아쉬우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파트너 최애의 아이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한 일! 가자! 로프몬! ?? : 내껀데? 젠장! 이따위 비만토끼를 도대체 누가 선점했단 말인가? 귀여워서인가? 이런 어중간한 개체를 선점해 버리다니 세상을 구할 생각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게 분명하다. 좀처럼 파트너를 찾지 못해 분노를 삭히며 한탄하던 노인··· 그때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물컹하고 불쾌한 감촉, 코를 찌르는듯한 악취 노인은 단번에 알아챘다. 그 녀석이구나··· 수많은 세계를 모험하며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녀석 너무나도 처참한 전투력과 추레한 외모로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특출난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그저 허드렛일만 할 뿐 결전에선 얼굴조차 내비칠 수 없었던 하찮은 그 녀석 분명 오랜 정은 있었으나 파트너로 삼을 순 없다며 내치려던 순간 노인은 보고 말았다 그저 성심껏 당신을 위로해 주는 순수한 눈빛을 그 눈빛은 노인으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높디 높은 위상. 파격적인 전투능력. 뇌절에 가까운 설정. 고개를 올려 우러러보아야 할 만큼 크고 멋진 외형. 하다하다 개인적인 편애··· 온갖 것을 재단하며 따져대던 당신의 추하디 추한 모습··· 노인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고 녀석은 당신의 곁에 남아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었다 진정된 노인은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도저히 녀석과 함께 세상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빈 말이라도 좋게 포장 할 수 없는 신조차 외면한 친구였기에 내칠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노인은 실로 난처 할 따름이었다 그 순간 노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하나의 의문점 정말 모두 그 녀석의 탓인걸까? 나약하다고, 노력해봐야 결국 안 된다고. 그렇게 단정 지었지만 진정으로 나약한 건 노인, 당신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많은 세계를 경험하고 해쳐오며 선입견에 사로잡힌 게 아닐까? 이윽고 노인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으니 세상에 나쁜 진화는 없다. 이번에야말로 너를 세상의 끝으로 데려가 줄게

가자! 워매몬!